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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보고

대니얼 임머바르, 《미국, 제국의 연대기》, 글항아리, 2020년

#치밀하게, 더욱 치밀한 제국주의 

 

 

사실, 미국이 그럴 줄 알았지. 

 

 

대학시절, 내가 다니던 과는 영어영문학과였다. 어느 과나 그랬듯 과 회식 때 항상 건배를 하면서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반제영어영문학과”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은 상당히 어색하고 기괴하다. 영어랑 영문학 배우는 과에서 영국,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꼬집다니. 아마 80년대 선배들의 유산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입학했던 90년대 후반에는 싸워야 할 미국이나 군사정권과 같은 뚜렷한 ‘공동의 적’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오히려 내 세대는 고3, 대학교 1학년 때 맞이한 IMF가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광화문에 있는 미대사관이나 용산의 미군기지 보다는 높아가는 자살률 그리고 기울어져 가는 우리 집의 현실이 내 숨통을 죄어 왔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세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태어났다면 대략 비슷했을 거다. 

 

고등학교 때 우루과이라운드, 스크린쿼터, 일본문화 개방 그리고 고1때 처음 접했던 인터넷 은 ‘이젠 우리나라가 무장 해제되는 구나’라는 작은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개방이 큰 영향을 주었으나, 일부에서 우려하는 절멸까지 치 닫지는 않았으니 다행일는지 모르겠다. 의견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해 비교우위에 있는 산업군들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대부분은 수긍할 거다. 

 

이런 상황에서 “반제영어영문학과”라니. 뒤처진 시대감각마저 느끼게 했다. 학교에서 총학생회는 사라진 적을 내부에서 찾았고, 그것이 바로 학내민주화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학교에 타격을 주는 방식이 총장실 점거였기에 본부 쪽 앞마당에는 종종 의자들이 쌓여있었고, 학생회임원들은 삭발을 하고, 교수들의 그림자밟기 퍼포먼스 등을 하면서 적대감을 유지했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런 행동들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이었다. 결국 학생회 임원들은 등록금 혜택을 누리고 있었고, 이와 함께 학생회비를 운용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항상 이런 말들이 돌지 않나. 학생회장하면 얼마 얼마를 통장에 저축할 수 있다고) 더욱 나를 이들과 멀어지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재수를 했던 나는 당연히 한 학번 선배들과 동갑이었고, 내키지는 않지만 “선배”라는 호칭을 항상 붙여줬다. 그러던 어느 날 과방에서 선배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이 취하자 나와 동갑이었던 어떤 선배가 “기석, 너 앞에서 노래 불러봐”라고 명령을 했고, 난 바로 싸움할 기세로 덤볐다. 사태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수습은 됐지만 이후 학번은 깡패니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바람에 완전히 그들과 절연했다. 그래도 나는 화가 식지 않아 당시 영문과 학생 모두가 볼 수 있는 게시판에 실명을 거론하며 나에게 명령했던 녀석들을 저격했다. “학번은 커리큘럼 상 편의를 위해서 구별한 것일 뿐. 높고 낮음이 아니다. 학내 민주화를 외치기 전에 너의 스스로 민주화를 해라”라고. 

 

독서일기인데 이렇게 예전 이야기를 너무 주절거렸나보다. 이렇게 길게 말했던 건 나에게 그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부조화 때문이었다. 어설프게 반제국주의, 저항을 외쳤던 영문과 동기와 선배, 후배들의 독선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책 제목을 보자마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한지 벌써 15년이 된 지금, 다시 그 시절과 마주하고 싶었다. 

 

책의 제목은 조금 길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라는 제목에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저자는 노스웨스턴대 역사학과 부교수다. 다른 것보다도 이 책이 주는 장점은 가독성이다. 문장이 길지 않고 번역투가 적어 쉽게 읽을 수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좋은 내용에 좋은 번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의 기원과 양상을 색다른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제국주의란 끊임없이 식민지를 늘리고 그곳에서 원주민 착취, 자원을 수탈을 하는 강대국의 정책을 말한다. 그런데 미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열강들과는 제국, 팽창주의 정책을 폈다는 게 이 책의 주요 논의거리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편다. 물론 노골적인 방식이 아닌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말이다. 영토는 확장하면서도 그곳에 사는 사람은 자국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종속을 하는 형식으로 식민지화한다. 

 

"미국은 평등을 약속하면서 동시에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해, 백인 정착민들의 거주지인 영토를 급속도로 점유해가면서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p.118
"전 세계가 무역에 문을 닫아 걸자 주요 국가들은 내수 생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수란 식민지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제국의 주요 이점 중 하나는 바로 멀리 떨어진 섬나라를 경제적 측면에서 무제한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p.233

더 나아가 전 세계의 기술 표준을 선점, 독점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제국의 영토선을 무한대로 확대했다. 

 

"미국은 형식상 제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졌다. 화학 및 산업공학의 혁시노가 함께, 미국의 뛰어난 병참술은 식민지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미국이 새로운 유형의 세계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대규모 토지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줄어들고 작은 부분을 통제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p.318
"미국이 이에 앞장서 최대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독립시켰으며 점령지를 내주고 유럽 국가들에 식민지 제국을 포기하라고 옆구리를 찌르며 군대를 해산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전후 어떤 토지도 합병하지 않았다." p.338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첫째, 전쟁은 식민지 제국에 주요한 장애물인 전 세계 반식민지 저항 운동에 부채질했다. 둘째, 전쟁은 거대 식민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전 세계에 실력을 과시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알려줬다." p.338
"19세기 식민 지배국들은 자부심에 가득 차 영토 합병에 나섰던 반면, 1960년대가 되자 노골적인 제국주의로 인해 점점 세력이 강해지는 제3 세계의 분노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p.389
"전 세계의 반제국주의적 저항은 식민지 유지비용을 높였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면서 강대국들은 사람이 거주하는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도 제국의 이점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식민지에 대한 수요는 낮아졌던 것이다." p.390
"미국 경제 전반에서 식민지는 화학으로 대체되었다." p.399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대부분의 열대작물 무역에서 봉쇄당하면서 문제 해결에 매진하자, 합성소재 혁명이 탄생할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p.404

원자재를 식민지에서 조달하기 보다는 국제 무역이나 합성물질로 대체를 하게 됨으로써 원자재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미국이 화학을 통해서 합성물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석유가 필요했고, 외국에서 수입해야 만했다. 결국 제국의 논리로 돌아가고 싶을 수밖에. 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식민지에 대한 직접 지배 대신 효율적인 방법을 제공했다. 물류와 통신으로 

 

"미국은 자국의 관할권이 없는 외국의 영토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기술이 영토를 대체한 셈이었다." p.436
"표준을 공표하는 제국의 능력은 식민지 정복의 주요 이점이었다. 제국의 표준화란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자의 관행이 지켜진다는 의미였다. 제국은 새로운 법과 아이디어, 언어, 스포츠, 군사 협정, 패션, 도량형, 예의범절, 화폐, 업계 관행 등을 식민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p.448

기타를 치면서 A음이 440 헤르츠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왜 440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었다. 이것 또한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로 미국이 1917년 이후 A음을 440로 맞췄던 것이 결국 435헤르츠 프랑스 표준음을 이긴 것이었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것도 어쩌면 강대국들이 원하는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미국은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 경험을 통해 식민지를 점령하지 않고도 권력을 나타내는 기술을 터득했던 것이다. 1940년대 한 필자의 표현처럼 새로운 기술로 미국은 '합병 없는 지배'를 달성할 수 있었다." p.465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제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대규모 식민지는 처분해버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소규모의 반주권지역, 즉 군사기지에 투자한 것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그런 기지가 800여 개에 달하며 그중 중요 기지는 섬에 위치해 있다." p. 506

알카에다 얘기도 나온다. 

 

"구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내는 데 작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 빈라덴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그러나 충분한 지원을 받은) 게릴라에게 패한 세계 군사 강국을 본 것이다. 1989년, 구소련의 적군이 우즈베키스탄으로 퇴각했다. 1991년, 유럽 공산주의가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p.552

약간 비약이 심한 구석이 보이는데...과연 그랬을까? 

 

인종주의에 대한 부분을 다루는데 트럼프의 당선에 대해 "오바마의 '미국인다움'에 대한 대중의 의심이 없었더라면 트럼프가 당선될 가능성은 꽤 낮았을 테니까" p.586 

결론은 이렇다. 

 

"그러나 제국은 단순히 비난조의 말이 아니다. 이는 좋든 나쁘든 전초 기지와 식민지를 거느린 나라를 묘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제국은 한 나라의 특성이 아닌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봐야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미국은 명백히 제국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p.589

 

역사를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업은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말이다. 간만에 좋은 책을 봐서 배가 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