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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보고

나관중, 《삼국지 10권》, 민음사, 1995년

#힘든 대장정의 끝에는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지 

 

드디어 종착역이 왔다! 

드디어 1권에서 시작한 삼국지가 10권 끝에 닿았다. 이번에 읽었던 삼국지는 그 세 번째로 처음 읽었던 건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설마 그렇진 않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린이들의 필독서는 링컨, 에디슨 그리고 퀴리 부인 등의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담긴 ‘위인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학교 분위기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었고(애국조회, 어린이헌장, 국민체조, 심한 체벌) 특히나 어린이는 독립된 주체가 아닌 부모의 종속물, 그저 관리의 대상이자 순응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조금이라도 겸손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선생들은 가혹한 훈육을 가했다. 결국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80년대 후반 90년 초, 필독서는 자제하고 인내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심어준 도구였던 셈이었다. 

 

살짝 이야기가 엇나간 것 같다. 아무튼 초등학교때 읽었던 삼국지는 삼촌이 사주신 3권짜리 다이제스트였다. 사실 지금 기억을 해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너무 압축을 한 탓인지, 당시 빠져있던 추리소설 팬더 시리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별 재미없이 읽었던 삼국지를 다시 읽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내가 가지고 있던 판본이 94년이니까) 당시에 이문열이 쓴 민음사 10권짜리 삼국지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학생이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지하철에는 노란 그 책을 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으나 그때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뭐랄까. 영웅호걸이니 의니 충이니 하는 가치가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초딩 때처럼 당시엔 영화에 빠져있기도 했고. 

 

그러다 나이 40이 넘어서 다시 읽게 된 건 좀 더 쉽게 읽을 책을 찾다 책장에서 눈에 띈 녀석이 바로 삼국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권을 제대로 완주하고 싶은 욕심도 은근 작용을 했다. 그래서 연초부터 1권부터 정주행을 시작한 거다. 블로그 글에서도 썼지만, 사실 삼국지라는 게 픽션이고, ‘지금’에 읽어서는 그다지 도움될 게 없는 요소들이 태반이다. 특정인물을 신격화시키고, 정사에는 없는 내용을 추가하고, 인물들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대의명분이라는 게 결국 사리사욕이니 말이다. 그냥 오기로 완주를 했다. ^^ 하지만 궂은 여행에서도 배울점은 항상있게 마련이지 않나. 지루했던 8권을 넘어 9권에서 마주했다. 

 

학소의 유언 중에서 "사람은 그때그때 맞추어 살아가면 되는 법, 죽음도 크게 두려워할 건 못된다. 좋은 자리가 따로 없고 정한 방위가 따로 없으니, 내 무덤은 동서남북 어디든 네 맘대로 써라." p.43

삼국지를 읽으면 모두가 제갈량처럼 지모와 임기응변이 뛰어나길 원하고, 관우처럼 무예와 인성을 갖추고, 조운처럼 싸움터에서 지지 않기를 원할 거다. 나는..글세. 이런 인물에서 전혀 감동을 하지 않고, 삼국지의 언저리 아니 스쳐지나가는 챕터에서 나온 학소의 유언에 깊이 공감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전쟁터인 사회에 나가보니 아무리 훌륭한 무기 혹 말을 가지고 있은들 생존하기 어렵다는 걸 배웠다. 요리조리 처세를 잘하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내가 너무도 부러워하고 배우고도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차라리 상황을 피하지 않고, 순간순간 변화하는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드린 친구들이 아직까지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회생활이 그렇지 않나. 부드러울수록 오래 버틴다는 거.  

 

삼국지 맨 뒷표지엔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사람들의 말에 <젊어서는 삼국지를 읽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게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삼국지에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포부를 길러주고 지혜와 사려를 깊게 하는 어떤 것들이 담겨있다는 뜻이다.” 글쎄. 나는 다시 바꾸어 말하고 싶다. 지금 현대인이 보기에 삼국지는 단지 너무도 극화된 역사 소설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지략이라는 것도 대부분 현재 시점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영웅담을 만들기 위한 소재이기 때문에 어릴 때 재미로만 봐야한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책장에 많은 공간을 차지했던 삼국지를 이제는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래도 버리기 전에 좋은 구절을 찾아서 다행이다. 대신 그 빈자리엔 적어도 10년은 놓아둘 책으로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