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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보고

이종열, 《조율의 시간》, 2019년, (주)민음사


명인들의 이야기는 일종의 신화다. 온갖 고난을 헤치고 남들이 쉽게 다다를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을 얻고 결국 한 분야에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되니 말이다. 이 책은 조율의 명장 이종열 선생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지은이 이종열 선생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검색하면 항상 그와 지메르만은 마치 자웅동체처럼 기사에 등장한다. 대략 이런 얘기다. 197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연주만 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조율에 있어서도 까탈스러웠다. 한때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조율사가 되고 싶어할 정도여서 해외공연할 때 자신의 피아노를 공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종열 선생이 그의 피아노를 조율했고, 공연 뒤 지메르만이 관개들에게 선생의 조율에 감사한다는 얘기를 하여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조율사가 되었다는 스토리다.

책의 구성은 본인이 자라온 성장배경, 유명 연주자와의 에피소드, 조율에 대한 철학 그리고 후배들에게 남기는 말 순서로 되어있다. 반나절 정도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문장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어느 자서전이든 살짝 자아도취가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 역시 명장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태도로 보인다.

다만, 연주자와의 에피소드들이 비슷하게 반복이 되어 좀 지루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조율이라는 분야에서 평균율, 순정율이라는 방식은 매우 철학적인 개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구성하느냐, 전체를 위해 부분을 조직하느냐는 마치 지젝과 라클라우/무페처럼 헤겔식이냐 아니냐의 대립으로도 읽혔다.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확신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좋다는 건 누구나 알 거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건 빈약한 상황으로 인한 두려움일 테지만 말이다.

"아름다운 소리에 힘이 갖추어지면 조율사가 감동하고 다음으로 연주자가 감동하고 끝으로 청중이 감동한다." p.5

"콘서트 조율사에게는 조율이 곧 연주다." p.63

"음정에는 이론적으로 계산된 물리음과 음악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커브음의 두 종류가 있다. 당연히 조율도 노래도 커브음이어야 한다. 전자 기계에 의하여 조율한 피아노가 음악적으로 거칠게 들리는 것은 기계가 사람의 청각처럼 커브음을 구별할 수 없고, 피아노의 현이 전자 기계처럼 정확히 규칙적으로 진동하지 않아서 화음 구성이 고르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p.64

"피아노는 건반 하나에 세 줄씩 매여 있다. 줄 하나가 끊겨도 세 개가 모두 끊기는 경우는 연주장에서 드물다. 끊긴 줄을 걷어 내면 남은 줄이 조금 빈약한 소리를 낼지언정 빠른 패시지 정도는 크게 표시 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p. 106

"낮은 쪽 음은 점점 더 낮게, 높은음은 점점 더 높게 조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조율 커브다." p.200

"리스트 곡을 치면 고음이, 베토벤 곡을 치면 고음과 저음이 흔히 끊어지며, 바흐나 모차르트의 곡은 비교적 안전하다." 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