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비평은 어떤 비평 척도에 따라 대상에 관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대사 자체를 강화하고 보충하는 비평이다. 낭만주의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평한다는 사실 자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 비평은 내재적 비평이자 ‘긍정적(positiv) 비평으로 특징지어진다.“ p.9
벤야민에 의하면 낭만주의 비평은 근본적으로 작품의 ‘산문적(prosaisch) 핵을 드러내는 데 본질이 있다. p.9
벤야민에게 낭만주의 비평은 대상 속에서의 무한한 ‘의식의 고양’으로만 그치고 앎(지식)을 정주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대상에 대한(역사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결국 대상 자체를 무효화(파괴)할 필요가 있다. p.10
작품 내부로의 낭만주의적 침잠(미메시스)과 알레고리적 파괴(중단)는 벤야민의 비평방식을 특정짓는 양극이 되며 필자가 보기에 그 양극은 서로를 조건 짓는다. 이것은 비평(Kritik)과 주해(Kommentar)가 서로를 조건 짓는 방식과 유사하다. 즉 비평가로서 벤야민은 전승된 텍스트들을 주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철학적 비평을 전개한다. p. 11
해석이란 문학작품을 둘러싼 사실들을 역사적 자료로서 실증주의적으로 확정하는 일도 아니고 수용자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인상을 기술하는 일도 아니며 그때그때 시간적 제약 속에 있는 주체가 자신이 처한 현재에 대한 역사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상과 만나는 데서 생겨난다. p.16
벤야민에게 역사의 진정한 이미지는 변증법적인 이미지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할 역사를 위해 파괴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문화사가 지어 보이는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가상, 그리고 역사가 진보한다는 가상이다. 이러한 가상들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이 직면한 현대의 위기 상황, 지금의 ‘비상사태’가 상례였음을 깨달을 수 있다. p.18
벤야민은 경험을 “살았던 유사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칸트적 의미의 경험, 즉 자연과학적 인식이 되기 위한 경험에 포괄되지 않는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억’, ‘꿈과 깨어남’, ‘충격’ 체험, ‘마약’ 체험, ‘기시감’과 같은 초심리학적이고 ‘신비적’인 체험 일반을 주목한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늘 예술가, 미개인,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 예언적 투시력을 가진 사람, 어린아이의 경험에 관심에 끌렸다. p.22
예술작품에 대한 경험은 그에게는 좁은 의미의 ‘미학’의 카테고리에 묶어둘 수 있는 경험이 아니며 오히려 ‘미학’이라는 분과학문적 틀을 폭파하는 인식론적,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갖는 경험의 ‘소우주’로서 파악된다. 그리고 벤야민에게서 “미적 가상”은 헤겔과는 달리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 아니라 신화를 인식하게 하는 신화적 매체와 같은 성격을 띤다. p.22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진보의 신화에 대한 과격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이 진보의 신화에 의해 억압되어온 역사 전체를 구제하는 구제비평적 시각으로 특징지어진다. p.30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역사를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신화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온 계몽의 역사이자 동시에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발전해오면서 계몽이 다시 신화로 퇴행하는 부정적 변증법으로 점철된 역사로 보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이러한 이성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찾으려 한다. p.34
벤야민의 이러한 미메시스적, 마법적 읽기는 어떤 직관이나 아우라적 경험을 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탈신비화하는 자기변증법적 각성의 구조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미메시스 읽기의 목표를 “마법의 해체”, 신화의 해체에 두는 것이다. p.41
벤야민은 헤겔적인 ‘생성’의 변증법에 의도적으로 대립하여 메시아적인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p.42
폭력의 어떤 기능 때문에 그 폭력이 근거를 갖고 그처럼 법에 위협적으로 보이고 또 법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는 바로 현재의 법질서에 의거해서도 그 폭력을 펼치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는 곳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p.86
첫째 자본주의는 순수한 제의종교로서, 어쩌면 지금껏 존재했던 가장 극단적인 제의종교일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제의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교리도 신학도 모른다. 제의의 이러한 구체적 성격과 연과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두 번째 특성인데, 즉 제의의 영원한 지속이 그것이다. p.122
세 번째 특성으로 이 제의는 부채를 지운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추측건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이다. p.122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은 종말까지 견디기, 궁극적으로 신이 완전히 죄를 짓게 되는 순간까지,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견디기이다. p.123
종교가 존재의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인 점에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요소가 있다. p.123
이 인간이 바로 자본주의적 종교를 인식하면서 성취하기 시작한 초인이다.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네 번째 특성은 그것의 신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 그 신이 지은 죄의 정점에서 비로소 그것의 신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 그 신이 지은 죄의 정점에서 비로소 그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p.123
억압된 것, 죄스러운 생각은 아직 해명되어야 할 깊은 유비관계에서 보자면 바로 무의식의 지옥이 그 이자를 지불하는 자본이다. p.123
종교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p.147
“과학이 정복한 것들은 논리적 사고보다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둔다”는 선언으로 이루어낸다면 p.155
유리로 된 사물들은 ‘아우라’가 없다. 유리는 보통 비밀의 적이다. 유리는 소유의 적이기도 하다. p.177
제정은 이 철조 건축술을 통해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건축술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p.185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처음에는 예전 생산수단의 형식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이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집단의식 속에 이미지들을 산출하는데, 이 이미지들 속에서 새것은 옛것과 상호 침투한다. 이 상들은 소망의 이미지들이다. p.187
모든 시대는 다가올 시대를 꿈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면서 깨어나기를 조급하게 기다린다. 모든 시대는 자신의 종말을 내부에 지니고 있으며 그 종말의 과정을 – 일찍이 헤겔이 인식했듯이 – 간계(List)를 통해 전개한다. p.212
유행은 상품이라는 물신이 경배받고자 하는 의식을 규정해 준다. p.233
엥겔스는 기술을 언급하면서 칸트의 현상주의를 반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p.271
기술의 불행한 수용이 그것이다. 기술의 불행한 수용이란 곧 기술이 단지 상품의 생산을 위해서만 사회에 봉사하는 상황을 한꺼번에 뛰어넘으려고 하는 활기차고 항상 새로운 시도들이 도달한 결과를 말한다. p.272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 p.286 푹스가 한 말
사실주의적인 예술시대들이 상업국가에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p.291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있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p.333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매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p.334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그것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성좌)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로 결정된다. p.348
역사의 영역에서 과거를 현재 속에 투사하는 일은 물질세계에서 변화를 위해 동일한 형상구조들을 치환하는 일과 유사하다. p.354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p.356
구원은 진보를 막는 경계선의 방어벽이다. p.360
과거에 지나간 것이 현재에 빛을 비추거나,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상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간 어떤 것이 지금과 만나 섬광처럼 성좌구조를 이루는 무엇이다. 옛날이 지금에 대해 갖는 관계는 (연속적인) 순전히 시간적인 관계인 데 반해 과거가 현재에 대해 갖는 관계는 변증법적 관계, 비약적인 관계이다. p.373
파국은 진보이고, 진보는 파국이다. p.376
현재를 역사적 시간의 연속체로부터 폭파해내는 것이 역사가의 과제이다. p.376
역사는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전유해야 할 과제만이 아니라 그 전통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를 갖는다. p.380
역사가는 과거를 향한 예언자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흘러간 불행들의 매체 속에서 본다. 이로써 그에게 서사의 유유자적함은 사라진 셈이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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