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일)
한낮에도 태양은 한 해 동안 세상을 비추는 일에 지친 듯 땅에 가깝게 누워있었다. 내 몸 역시 하루 종일 가라앉아 있는 듯 했다.
문득 2018년을 돌아보니 올해 내게 있었던 변화들, 유럽 출장과 이직은 마치 장갑을 거꾸로 뒤집어 안과 밖이 다를 정도로 이전과는 너무도 새롭고 생경한 경험이었다.
한예종 졸업전시 마지막 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가면서 문득 지금과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미대를 가겠다고 했던 때가 비슷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전시 중에 눈에 띄는 몇 작품을 사진으로 남겼다. 전시명은 <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다. 올해에는 생각보다 페인팅하는 학생 수가 늘었다. 4명 정도? 5년 전 졸전에는 페인팅이 2명 정도 밖에 없었고, 대부분이 영상 그리고 아주 적은 수의 설치 작품이 선보였으나 이번 전시에는 페인팅이 늘고 영상이 다수, 나머지 설치 작품 등을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상 부문에서는 날 멈추게 하는 작품은 없었고, 페인팅은 몇 작품 그리고 설치에서 딱 한 작품 정도가 눈여겨 볼만했다. 항상 그렇지만 형식과 메시지, 의욕이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고 어수선했고, 시간/성의 부족과 기성 작품의 틀을 차용한(좋게 말하면) 아쉬움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당장 돈이 있다면 살지 말지 고민을 하게 만든 흥미로운 작품도 있었다.
캡션을 찍지는 않았지만, 이건 판화 작품이다. 예술사 졸전에서 판화를 내놓는다는 건 준비를 많이 했다는 거다.(세부 전공이 판화일지라도) 맨 처음엔 문성식류의 드로잉으로 착각을 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법 밀도가 있는 판화였고, 큰 작품과 작은 작품이 작은 공간에서 서로 강과 약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주제면에서도 코난 도일이 쓴 “바스커빌 가문의 개”에서 모티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나는 이 친구를 수 년 안에 미술관에서 다시 볼 것 같다. 매체 희소성, 정성을 담은 작품의 밀도는 갖췄으니 지치지 않고 작업을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아~ 사진이 너무 구리다. ㅠㅠ
이 작품 다음으로 재밌었던 작품은 이 밑에 보이는 설치 작품이다. 오밀조밀 오브제를 재치 있게 구성을 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젠체하거나 혹은 시간이 모자라 급하게 재료를 구한 느낌을 찾아 볼 수 없다. 작은 개별 작품이 하나의 군을 형성해서 전체 전시를 구성하는데, 하나는 다른 하나와는 전혀 다르지만, 모여져 묵직하게 전시장을 채운다. 개념과 물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진지한 느낌을 받았다. 기초가 매우 탄탄한 학생으로 보였다. 졸전에서 이런 작품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추운 영하의 날씨였지만, 굳은 내 얼굴에 살짝 미소를 피우게 만든 그런 작품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7.62km 달리기로 하루를 마무리
#12월 31일(월), 1월 1일(화)
순식간에 모였다 흩어졌다.
불운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그리고 느닷없는 시간에 들이 닥치기 때문에 맞이한 순간 몸과 마음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녀석은 혼자 오지 않는다. 항상 다른 녀석이 뒤를 따른다.
회사에서 12월 31일 송년 행사에 직원을 동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오후 10시 30분부터 다음날 0시 30분까지 대기를 하라고 한다. 어차피 나는 짊어질 각오를 했기 때문에 그다지 괴롭진 않았다. 그런데 하필 1월 1일에 당직이 걸려버린 거다. 그리하여 아예 회사 근처 숙소를 잡고 장장 48시간 동안 회사 그리고 회사가 있는 동네에 머물기로 했다.
역시나 송년 행사에서 우리 회사가 해야 할 일은 그다지 없었기에 역시나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허무한 지시를 받은 순진한 이등병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행사 뒤에는 마치 중학교 극기 훈련 받으러 간 허름한 어느 수련원 같은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1월 1일 9시, 정확히 사무실로 출근했다. 뭐, 우울하긴 하지만 가벼운 당직 미션 수행과 함께 새로 산 신형철의 책과 빌려온 책을 차분히 읽을 수 있었다.
항상 그의 글은 나를 자극하고, 일깨워 준다.
결국 고전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위시리스트에 오래전에 넣어뒀지만, 이제야 회사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2018년 12월 31일과 2019년 1월 1일을 회사에서 보냈다. 친구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억울한 마음 그리고 감기 몸살을 얻었지만, 액땜으로 생각해야 하는...그렇게라도 스스로 위로를 해야 하는 그럴 필요가 있는 2019년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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